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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命理)/명리기초이론

명리학의 기원과 발전

by Antenna Saju 2020.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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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주명리학이란 사람의 생년월일시의 간지를 기준으로 그 운명을 예상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오성술(五星術),구성법,기학,육임,자미두수,등과 더불어 간지를 기준으로 하는 예언술 중 간지술(干支術)의 일종입니다. 

 

이와 같은 간지술(干支術)은 천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와 지지의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가지고 사주명식을 만들어 사람의 운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한 사주팔자 명식과 인간의 운명간에 인과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근대 과학적 개념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미신이라고 단언하는것은 과거 삼천년동안 이루어진 연구와 실험의 결과 등 역사적 사실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주명리학은 사람들의 사주 감명을 통해 얻은 경험치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통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것 그 자체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난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요? 물론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 아이가 생기지만 그게 어떻게 해서 나로 태어난 건지요? 이 기준으로 보면 인간의 운명을 판단하는 기준울 출생년월시로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신비로운 운명의 원인을 연구하여 숙명적 흉악을 제거하고 좋은일로 변화시키려는 철학적 사색과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이 이미 삼천년 전 부터 고대 중국에서 이루어진것은 현존하는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사주명리학의 발달은 삼천년 이상 오랫동안 걸쳐 제성현(諸聖賢) 및 제학사(諸學士)들이 깊이 연구하여 의하여 얻어진것입니다. 명리학의 시원은 2300여년 전 춘추전국시대에 「낙녹자삼명소식부」를 쓴 낙녹자(珞綠子)와 「귀곡자(鬼谷子)」를 쓴 귀곡자(鬼谷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들 때 부터 명리학에 대한 연구가 이미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간지(干支)사용은  하(夏 BC2070 ~ BC1600) 나라 때부터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전해지고 있는 하나라의 유물이나 유적이 없어 확실한 유적이 있는 상(商 BC 1600 ~ BC 1046) 나라 때부터 간지(干支)가 처음 쓰인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에 명리학의 근간이 갖추어졌고, 전국시대 말에 추연 (鄒衍)에 의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결합된 「음양오행」이라는 말이 처음 생겨났습니다.  

 

「사주(四柱)」라는 말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곽박(郭璞)이 저술한 옥조정진경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수(隋 581 ~ 618)나라 때 소길(蕭吉)은 율려와 칠정, 팔괘팔풍, 성정, 제신, 오제 등 오행과 연관이 있는 내용들을 다양하게 수록한 「오행대의(五行大義)」를 저술하였습니다. 당(唐)나라 때에는 현존 명리학 최고(最古) 서적 중의 하나라고 하는 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가 저술되었는데 이허중이가 사주팔자 중 년간(年干)을 중심으로 해서 오행의 생극(生剋)을 알아보는 법을 완성하였습니다.오대십국(五代十國)에서 송(宋)나라 때는 서거이(徐居易)와 서대승의 연해(淵海)와 연원(淵源) 그리고 료중(蓼中)의 오행정기가 저술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세상에 공표한 것은 중국의 태화서봉당(太華西峰堂)에 거주하던 서자평(徐子平)에 의해서입니다. 원래이름은 서공승(徐公升)으로 사람의 운명을 연구하여, 기운의 넘침과 모자람, 빠름과 느림을 조율하여 인간의 생애도 평온하게 유지하려는 학문을 발전시켜 '자평(子平)'이라는 말이 생겼고 서자평이라 불리었습니다. 이 사람이  일간(日干)을 중심으로 해서 오행의 생극을 구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창시하였습니다. 서공승(徐公升) 또한 연해자평(淵海子平)을 편술하였는데, 연해자평(淵海子平)은 사주명리학의 현존하는 서적 중 최고로 꼽힙니다.

 

 

이처럼 사주명리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현명한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왔습니다. 수천년 오랫동안 깊은 학문연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 사주팔자를 해석 방법과 기술에도 많은 변화를 거쳐 최초의 편술서(編述書)인 연해자평(淵海子平)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전부터 널리 행하여져 오던 오성술(五星術)이 당나라 때까지도 사주명리학과 막상막하의 세력을 다투더니 송(宋)나라 때 와서 연해자평(淵海子平)이 공표된 후에는 중국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오성술(五星術)에 관한 내용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과노성종(果老星宗)」이라는 책이 지금까지 전해지기는하나, 오성술(五星術)은 그 정확성이 사주명리학에 비하면 현저하게 낮습니다.

 

약 천년전에 세상에 발표된 연해자평(淵海子平) 자체도 중국의 화려한 사상으로만 활용되어 그 구성체계가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외격(外格)에 속하는 체용격사주(體用格四柱)를 불필요하게 비천록마격(飛天綠馬格)이니 임기용배격(壬驥龍背格)이니 하는 말로 미사여구만 나열하고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연해자평이 공표된 후 신봉장씨(神蜂張氏)가 쓴 벽류(闢謬) 명리정종(命理正宗)과 명나라때 만유오(萬有吾)가 편찬한 삼명통회(三命通會)등이 나오긴 했으나 큰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명나라 초기 유백온(劉伯溫)이 쓴 적천수(適天髓)가 400-500여년 동안 비밀리에 몰래 이어져 오다가 청나라때 세상에 알려지고 임철초에 의해 사주명리학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주명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는 태종의 탄생과 관련된 대목으로 태종원년 1401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려말에 들어온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종(太宗)의 모친인 신의황후 한씨가 문성윤(文成允)을 불러 아들 태종의 장래에 대해 물었을 때  "이 사주는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므로 점쟁이에게 함부로 물어보지 마소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명리학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과거 제도는 태조 원년인 1392년 잡과(雜科)에 음양과(陰陽科)가 편성되면서 부터이다. 正9品의 명리학 훈도(訓導) 2명을 두어 명리학에 관한 학문을 가르쳐 관상감의 관리로 배속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음양과(陰陽科)는 1474(성종 5년)년에 일시 빠졌다가 1865(고종2년)년 폐지될 때까지 조선왕조 300여년 동안 그 명백을 유지했습니다. 

 

 

[참고]

한국명리학의 역사적연구 (저자 구중회, 국학자료원) 

四柱精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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