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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命理)/명리기초이론

대한민국의 명리학 역사

by Antenna Saju 2020.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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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언제 「연해자평」이  전해 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음양오행설이 중국에서 이미 유가 사상이나 도가, 도교 등의 사상들과 학습하고 절충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형된 유가 사상과 함께 명리학도 들어왔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달려을 만드는 일은 제왕의 전유물로 백성을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기밀이라 쉽게 유출되기는 어려웠지만 운명을 판단하는 점은 민간에서 다양하게 연구가되고 실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명리학은 특별한 제약 없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학문 속에 포함되어 전래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역사에는 역학(易學)이나 성명학(星命學)이라는 기록은 있으나 사주(四柱)라는 용어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주(四柱)라는 단어 언급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조선왕조실록 태종편」에서 

태종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의 諱는 이방원(李芳遠)이요,... 태조(太祖)의 다섯 번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 씨 (韓氏)이다. 고려 공민왕 16년 (1367년) 정미 5월 16일 신묘에 함흥부 귀주 사제에서 탄생하였다. 한 씨가 점치는 사람 문성윤(文成允)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 사주(四柱)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라고 맨 처음 나타납니다. 

 

이 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팔자(八子)'라는 단어가 15 왕 대에 57건으로 100회 이상 등장합니다.

"사헌부에 명하여 전 지춘천군사(知春川郡事) 이속(李續)을 전옥(典獄)에 가두었다. 처음에 임금이 점치는 자 판수 지화에게 정해년 이전에 출생한 남자의 팔자를 구하여 추산(抽算)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마 혼사 때문에 사주를 보려고 한 것일거라고 짐작됩니다. 

 

 

이후에 팔자와 관련된 기록인 거의 역모와 관련된 것입니다. 역모의 주도자는 성패 여부를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주와 임금의 사주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임금의 사주를 보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던같스니다. 명종 기록에 나오는 "임금의 팔자는 책에 기록해서는 안 되니 속히 지워 없애라" 라는 말이나 "·······'이홍윤의 팔자가 임금이 될 만한지 저며보라' 하기에 신이 '팔자는 임금이 될 만하고 거사는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라고 답하였습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모를 위해서만 사주를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김의순이라는 자가 신의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가 가진 책을 보았더니 거기에 조정의 재상들과 조사(朝士)들의 팔자가 가득 적혀 있었는데"라는 말을 볼 때, 당시의 고관대작들도 흔히 사주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주를 보는 것은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데에도 많이 활용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채용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음양과(陰陽科) 초시(初試)에 천문학 10인, 지리학과 명과학(明課學) 각 4인을 관상감(觀象監)에서 녹명(錄名)하여 시취(試取)한다고 하였습니다.

 

"명과학(明課學)은 원천강(袁天鋼), 서자평(徐子平), 응천가(應天歌), 범위수(範圍數), 극택통서(剋擇通書), 경국대전을 강하게 한다..... 음양과 복시(覆試)는 천문학 5인 지리학과 명과학 각 2인을 뽑았다. 강서(講書)는 초시와 같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경국대전은 조산왕조 통치의 기틀이 된 법전입니다. 조선 건국 전후부터 1484년 (성종 15년)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간 왕명·교지·조례 등 영구히 준수할 것을 모아 엮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후 곧 법전 편찬에 착수하여 1397년(태조 6년)에 경제육전을 내놓았습니다. 이후 계속 수정되었고 1466년(세조 12년) 6전 편찬을 완료하였습니다. 이후 또 수정되었는데 그 구성은 6조의 직능에 맞추어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전의 6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이 중 예전은 61 항목으로 교육 ·문과와 잡과의 시험 규정 외교 의장 오복 의례에 관한 규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명과학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조선 초기 상류사회에서는 이미 명리학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기록으로 확인 된것은 없으나 고려와 송(宋)의 교류가 많았고 신라 말에 이미 풍수학의 위세가 대단했었다는 것을 보면 서공승의 명리학 체계도 고려 때에 진작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체계적은 명리학 연구의 계기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초기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동양의 전통이나 동양학을 한낱 미신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시대 부터 넓게 전파되었던 기독교는 명리학과 같은 동양적 학문을 배척하고 미신으로 여겼습니다. 근대화 과정부터 명리학은 철저히 배척당했고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겨우 이어져 왔는데 이 중 유명한 명리학자를 꼽으라면 도계 박재완, 자강 이석영, 제산 박재현 3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도계 박재완선생과 자강 이석영선생은 명리학의 학문적 연구와 저술 활동 그리고 제자 육성에 힘을 쏟은 반면, 제산 박재현선생은 역술활동에 집중하여 업적을 기록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도계 박재완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중앙 정보부장이던 김재규에게 '풍표 낙엽(楓飄落葉) 차복전파(車覆全破)라고 전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단풍이 질 무렵 차가 엎어져 전파된다 된 다는 뜻으로 "차지철을 죽을 때 화장실에서 죽을 것이고, 김재규는 전두환에 의해 판이 뒤집어질 것이다."라는 것을 함의한 의미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강 이석영은 「사주첩경」의 저자입니다. 후학들을 위해 지은 책으로 한국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과 소금과 같은 소중한 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책이 한자로 되어 있어 한글이 약한 요즘 세대가 읽기에는 많이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네요. 

 

제산 박재현은 1972년 박정희가 유신(維神)을 계획하고 자문을 구했을 때 담뱃갑에 '귀신이된다'라는 의미로 유신(遺神)이라는 동음어 한자를 적어 보낸 뒤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유명한 명리학자 한 분을 더 꼽자면 일체 공식적은 활동을 하지 않아 알려진것이 전혀 없지만 「사주 정설」이라는 명리 이론서를 출간한 백영관 (본명 최영철)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백영관은 당시 고등고시에 계속 떨어지자 그만 포기할 마음을 먹고 도계 박재완 선생에게 사주를 보러 갔었는데 "OO세에 합격할 것이니 포기하지 말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여 실제 박재완 선생이 말씀하신 나이에 합격하고 검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법고시는 합격수가 몇십 명 안 되는 엄청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역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스스로 공부를 하여 「사주정설」이라는 책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1983년 초판 인쇄를 하여 지금은 50쇄가 넘게 인쇄된 책으로 현재 한국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명리학자들은 모두 이 책을 가지고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분이 실제로 검사인지는 검증된 바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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